그가 설립한 프랜차이즈 기업 더본코리아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소유한 회사이다. 한때 빚만 17억을 지고 있었다는 그는 도대체 어떻게 장사의 신이 될 수 있었을까? 이번 인생이야기는 백종원과 더본코리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1966년 9월 4일, 충청남도 예산농업고등학교 교감이었던 백승탁과 그의 아내 이경숙 사이에서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 두 명과 남동생 하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종원의 가족은 외식 한번 가려면 적어도 5군데 이상의 식당을 돌아다녀야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종원의 아버지 백승탁이 엄청난 미식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종원은 어려서부터 음식에 대해 남다른 감각을 갖게 된다. 종원의 아버지는 출장을 다녀오실때마다 휴게소에 들러서 간식을 사오곤 했는데 어린 종원은 아버지가 사온 간식 맛을 보고 아버지가 어디로 출장을 다녀왔는지 알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충청남도 예산에 살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가 핫도그를 사왔을 때 그 핫도그가 옥산 휴게소의 핫도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로 상 대전을 다녀오시는 길이라는 걸 맞췄으며 햄버거를 사오는 날에는 천안 휴게소의 햄버거 맛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울 방향으로 다녀오신 것을 알아맞혔다. 종원의 아버지는 한번에 햄버거를 10개씩 사와서 냉동실에 얼려두곤 했는데 종원의 누나들은 이 햄버거를 먹기 위해 꽁꽁 언 햄버거를 통째로 프라이팬에 넣어서 데워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릴적부터 맛에 대해 타고난 감각을 지녔던 종원은 햄버거를 맛있게 먹기 위해 빵과 패티 그리고 야채를 분리한 뒤 빵은 버터를 발라서 구워내고 패티에 묻어있는 소스는 말씀이 제거하고 싱싱한 야채를 가져와 썰어 넣어 다시 재조립하여 햄버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가족들 모두는 그의 요리솜씨에 감탄했고 그는 자연스레 부엌의 실세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백종원의 어린시절, 두 번째가 백종원이다.
그는 만석꾼이었던 증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영향인지 어렸을 때부터 장사꾼 기질이 있다고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9살 때에는 산에 놀러갔다가 본 버섯 농장에서 별다른 투자도 안 한거 같은데 돈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꿈을 버섯 농사로 정한 적도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캔이 아닌 병에 음료가 나올 시절에 음료수 병을 보고 저게 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 학교 리어카를 빌려 병을 리어카 6개 분량을 모아서 고물상에 갖다 팔아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렇게 5학년 1학기까지 꽤 많은 돈을 모은 그는 당시 국가방위를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방위성금으로 수익금을 다 기부했다고 한다.
1985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 직후엔 잠시 서울특별시 장한평에 위치한 중고차 시장에서 지인의 소개로 중고차 판매 호객행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호객 행위가 너무 단순했으며 막상 이렇게 손님을 불러와도 안에서 딜러들이 설명을 너무 못하고 어떤 차를 원하는지 바로 알아채지 못해서 본인이 직접 알려줘도 딴소리를 하면서 손님을 놓치는게 답답한 나머지 그가 직접 딜러를 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주어지는 차 정보를 대강 외우고는 첫 손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40분 만에 차를 팔아버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며칠 만에 차 6대를 팔아내자 그는 중고차 딜러가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두 번째로 차를 사간 손님이 미터기 조작과 사고 경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모르고 팔았던 백종원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다고 한다. 거기에 충격을 받아서 자동차를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럴만큼 재밌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욕이 없어서 딜러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장사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한편 그는 부모님과 대학 진학 때문에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교육학과로 진학하길 바랐지만 그는 학교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타협점을 찾던 종원은 결국 연세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지금의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던 그는 학업을 뒤로 하고 낚시에 빠져 지내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호프집에서 치킨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이 일이 음식과 관련된 첫 번째 아르바이트였는데 공짜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특권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치킨 배달이 많지 않던 당시 사업에 관심이 많던 그는 주인 할머니에게 치킨 배달을 해보자며 배달 전단지까지 직접 돌렸다고 한다. 이때 상권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주변에 치킨 가게가 없으니 배달이나 포장 판매를 하는게 좋다고 생각해 주인 할머니에게 권유를 했지만 할머니는 썩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설득해서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서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을 받은 끝에 핸드메이드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게 된다. 그런데 전단지를 돌린 후 곧 배달 주문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종원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장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러다 얼마 안가서 일이 너무 많아지다보니 치킨 뒤기는 기계도 5대까지 늘렸지만 할머니가 병을 얻고 가게가 잘되니 힘들다는 이유로 가게를 내놓기로 결정했고 이걸 아쉽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가게를 직접 하지 않겠냐고 할머니가 먼저 제안을 하게 된다. 근데 "돈이 통장에 그렇게 많이 없어서요. 돈이 어딨어서 가게를 인수해요." 라고 말하니까 할머니가 "지금 가진 것 만이라도 가져오면 내주겠다. 너는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가게를 그에게 넘긴다. 그렇게 잔금을 모두 갚으면서 가게를 완전히 인수하고 이후 대학교 3학년때는 3년간 가게 3개를 운영하며 15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으나, 백종원이 강남 유명 호텔의 나이트 클럽을 인수하려던 것을 알게 된 가족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부모님께 떠밀려 학사장교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9년, 가족에게 쫒기듯 학사 14기로 임관하고 난 이후에 제7포병여단에서 포병장교로 복무했지만 중간에 취사장교라는 전무후무한 직책을 만드는 업적을 달성했다.
당시 중위였던 그는 뛰고 운동하는게 너무 싫어서 고민이 많은 상태였고 짬밥이 하도 입에 안 맞아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 하겠다고 판단하고 그냥 취사반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당시 간부 식사를 담당하던 부사관과 몰래 보직을 바꿔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고 당시 간부 식당에 있던 취사병들은 입대 전에 보조 요리사로 근무하던 전문가였기 때문에 뜬금없이 나타난 그를 알게 모르게 무시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도 민간인 시절에 요리사였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취사병들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 그는 확실히 주도권을 잡을 방법을 고심하다가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고 그렇게 그는 밤에 장교숙소로 돌아간 뒤, 거의 10일 동안 밤새 무채 써는 연습을 해서 그렇게 10일 동안 연습한 끝에 그는 점심 반찬으로 무생채를 메뉴로 정하며 가로, 세로 0.5cm의 무채를 썰어내는 모습을 취사병들에게 보여주며 완벽하게 그들을 굴복시키고 말았다고 한다.
장교가 자기 임무 팽개치고 취사반이나 기웃거린다고 참모 장교한테 불려가서 조인트를 맞기도 했지만, 식당을 기습 시찰한 사단장님께서 밥맛을 보고는 백중위의 보직을 정식으로 인정해버리면서 완벽한 취사장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참모 장교들의 대우가 180도로 바뀌게 되고 군 제대 1년 전 간부식당의 운영을 맡아 된장끼개를 뚝배기에 담아주는 것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뷔페식으로 바꾸는 업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명색이 장교인데다 음식 맛을 본 별들의 선택에 의해 조리사관이 된 만큼 사회로 치면 수석 요리사인 셰프역할을 하면서 휘하 병력들에게 보조적인 지시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백종원은 장교 출신자 중에서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 전무휴무, 그리고 유일무이한 보직인 '급양과장'으로 인정받아 보직했던 경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전역이 약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시작한 일인데도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임한 듯 하며 오히려 이 일이 재밌어서 외박도 안 나갔고 그 장군에게 1년만 더 하지 않겠냐고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백종원의 군복무 시절 급양과장 모습
그런데 전역 후 그는 생뚱맞게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에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논현동에 사무실을 하나 구한 뒤 전화기를 한 대를 놔두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는 전화번호부에 인테리어 사무실로 등록했으니 당연히 연락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요리에 관해서는 머리가 핑핑 돌아가던 그였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텅텅... 그러던 어느 날, 할일이 없어서 심심했던 그는 인테리어 사무실을 소개해줬던 부동산을 놀러가게 된다. 그리고 부동산에 놀라왔으니 그냥 인사치레로 "어디 괜찮은 식당 없어요?" 하고 물어봤는데 갑자기 식당 하나를 소개해주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를 식당에까지 데리고 나오게 된다. 당황한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궁리를 찾게 되고 그리고 임대료와 권리금이 맞지 않았을 경우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라 판단하고는 권리금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부동산 사장은 임대료와 권리금을 알려줬는데 그는 정말 식당을 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권리금이 너무 높다고 애기하며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권리금을 낮춰서 요정도 금액이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애기했다. 부동산 사장은 그렇게는 안된다고 애기했고 그렇게 식당 애기는 끝이 난 듯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는 부동산 사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식당 주인이 그 말도 안되는 가격의 권리금으로 가게를 넘기겠다고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상황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계약을 하게 되고 그렇게 1993년 4월, 그의 첫 번째 식당 원조쌈밥집의 역사가 얼떨결에 시작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쌈밥만 팔아서는 남는 게 별로 없어 보였고 망하지 않으려면 대책을 마련해야만 되었다. 그러다가 삼겹살을 같이 팔아보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돼지고리를 정육점에서 썰어와서 파는 식당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는 돼지를 통째로 가져와서 직접 썰어서 팔면 원가도 절감하고 손님들도 더 신선하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곧장 육절기를 사러나가게 된다. 이것저것 찾아보니 조금 저렴한 육절기가 눈에 띄었고 돈을 아끼기 위해 그 육절기를 구매했으나 사놓고 보니 이것이 돼지고기용이 아닌 햄을 써는 육절기였고 하는 수 없이 돼지고기를 햄용 육절기에 넣고 썰었더니 고기가 아주 얇게 돌돌 말려서 나왔다고 한다. 말려진 고기를 한 장 한 장 다시 펴서 팔던 그는 식당이 바빠지기 시작하자 고기를 펼 여유가 없어서 그냥 말린 채로 테이블에 내기 시작했는데 한 손님이 돌돌말린 고기를 보고 "이게 뭐에요? 무슨 대패밥도 아니고!" 라며 불만을 토로했고 그는 그 말에 영감을 받아 돌돌 말린 고기에 대패삼겹살이란 이름을 붙여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패삼겹살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며 그의 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이후 1996년 대패삼겹살에 대한 특허 신청을 하여 상표출원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어렵게 장사하는 자영업자를 위해 상표를 악용하지만 않는다면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해줬고 그 덕분에 대패삼겹살을 보통 명사나 다름없이 사용되고 있다. 자신이 개발한 메뉴가 반응이 있자 신이 난 그는 자신만의 특제간장소스를 개발했다. 얇은 대패삼겹살을 찍어먹기에 아주 맛난 소스였지만 한 두번 찍어먹다보면 돼지기름이 허옇게 둥둥 뜨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 그는 어느 날 꿈속에서 고기를 구워서 소스에 찍어 먹는 대신 고기를 먼저 소스에 찍은 뒤 구워먹고 있었고 꿈에서 깬 종원은 곧장 가게에 가서 고기를 소스에 찍어서 구워먹어보았다. 그렇게 맛과 기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을 수 있는 비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종원의 첫 번째 식당 '원조쌈밥집'
햄용 육절기
돼지고기용 육절기
햄육절기에 넣고 썰은 돼지고기 '대패삼겹살'
그러나 여기에서 백종원 인생 최대의 굴곡이 시작되었는데 IMF로 주택 사업이 망하고 자신의 수중에는 17억원의 빚과 원조 쌈밥집 가게가 전부였었다고 한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자 결국 인생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장소로 홍콩을 선택했다. 막상 출국해서는 일단 좀 먹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에 들어오는 식당들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이때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들이 떠오르면서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이후 17억원의 채권자들을 모두 모은 뒤 그 앞에서 '기회를 주신다면 식당을 해서 모두 갚겠다.'라고 말했고 채권자들은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전원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한다. 이후 백종원은 사업에 전력으로 덤벼들어, 망해가고 있던 원조 쌈밥집 가게부터 시작해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998년 한신포차를 시작으로 2002년 본가, 2004년 해물떡찜0410, 2005년 새마을식당, 2006년 빽다방, 홍콩반점 등 내놓는 아이템마다 대박을 치며 17억이나 하던 빚을 모조리 청산했고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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