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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

강호동이 씨름선수로 살아온 인생스토리

by 세바시인턴 2020. 6. 25.

 그는 1970년 7월 14일 진양군 이반성면 길성리 평동마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학교는 씨름부가 있는 마산에서 쭉 다녔고 산호초등학교, 마산중학교, 마산상고 씨름부를 나온 후 대한체육과학대학 격기지도학과를 중퇴한 것으로 확인된다.

 마산중학교 2학년 시절 마산중학교 근처에 있는 산상고등학교에 가서 고등학교 씨름부 형님들과 씨름으로 맞붙어서 꼼짝도 못하게 발라버렸다. 심지어는 이 때 얻은 엄청난 유명세로 인해 중학교 2학년 나이로 무려 경남대학교 씨름부 선수들과 씨름으로 맞붙어 박빙의 역량을 보여줬다고 한다. 강호동은 어렸을 때 부터 씨름의 천재였다. 씨름을 어찌나 잘했는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프로 선수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같이 뉴욕으로 전지훈련도 가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똑같은 스포츠 머리스타일과 위협적인 비율 때문에 한때 조폭이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씨름선수 때는 선수로 사느라 바빴기 때문에 그는 조폭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조폭루머가 널리 퍼진 이유는 그가 고등학생 시절에 마산지역 짱으로 유명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 짱이었던 그가 운동까지 시작해서 천하장사까지 먹었으니, 여느 조폭들은 상대로 안 될 만큼의 싸움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간 패싸움에 특급용병으로 동원이 되었다. 학교에 경찰차가 오면 십중팔구 강호동 때문이었다는 인터뷰도 있고 다른 학교 학생들이 시비를 걸다가도 강호동을 불러온다는 말만 들으면 알아서 도망갈 정도였다고 한다.

 옆 동네 학교를 다녔던 주민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마산에서 당시 강호동이 나이트를 단신으로 뒤집어놨다는 전설이 전해져 올 정도라고 한다. 덕분에 고교 시절 대학 씨름부의 무한 러브콜을 받았었는데 부상을 당해서 냉대를 받는 상황으로 전환되자 주변인들이 그가  행여나 나쁜 길로 가면 어쩌나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대학 입시 문제로 서울에 갔다가 강력계 형사들에게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강호동 포함 덩치 큰 남학생 세 명이 신사동 숙박업소에 묵으면서 '아줌마, 우리 어른이니까 비디오 재미있는 거 틀어주세요.'라며 성인 행세를 했다가 단속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70으로 시작되는 진짜 주민등록번호를 순순히 밝힌 친구들과 달리 강호동은 67로 시작되는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말했고 결국 신원조회가 안되자 강호동 일행을 조직폭력배로 오인한 강력계 형사의 집단 방문으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을 겪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천하장사 시절 벤치 프레스를 165kg까지 들 수 있었다. 이외에도 스쿼트는 280kg, 데드리프트는 320kg 까지 들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씨름선수들의 악력을 비교해보자면 씨름 선수 후배 신봉민이 350kg의 풀 스쿼트를 세트당 15회 이상 하며, 김영현이 손아귀의 악력이 117kg이다. 이렇듯 그가 전직 천하장사로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헬스 좀 한다는 일반인들도 70~80kg 성인 남성 기준으로 볼 때 스쿼트나 데드리프트를 제법 들어도 200kg정도니 말이다.

 벌크로 인해 살을 찌웠기 때문에 병역은 과체중으로 제2국민역이 되었는데 그 당시 130kg가 넘는 체중이라서 군복무는 제외가 되었다.



 1987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이미 그가 씨름 유망주로 소개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키가 182cm, 몸무게가 110kg에 달했었다고 한다. (당시 18살) 그의 데뷔전은 1989년 3월 대전 천하장사대회 8강전이었다. 데뷔전 때부터 괴성을 지르며 압도적으로 등장했지만 경기도증 양 선수 모두 샅바를 놓치게 되었고 아직 심판의 중단 신호가 없었음에도 경기가 중단 되었다고 생각한 강호동이 방심한 사이 상대인 이종식 장사의 기습적인 밧다리에 당해 넘어지면서 데뷔전에서 첫 패를 기록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만기와 붙었을 당시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이만기가 이 규정을 몰랐던 건지 허점을 보이다가 강호동이 달려들자 뿌리쳤으나 이후 강호동이 이종격투기식으로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키게 된다. 아무래도 이 패배가 그에게 있어서는 약기 된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고3 시절에 당했던 큰 부상 후유증 때문에 초반에는 활약을 못했지만 점차 후유증에서 회복해 기량을 찾게 된다. 그러다가 1989년 5월 일양약품으로 트레이드되면서 일양약품의 메인 간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 후 44회 장사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로 처음으로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특히 준결승전에서 이만기와의 첫 공식전을 치러서 2:0으로 승리를 거두는 기적을 일으켰는데 첫 경기때는 강호동이 본인이 개발한 기술, 두번째 경기때는 뒤집기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일양약품에 입단하여 휴유증을 완벽히 회복한 그는 1990년은 이미 일양약품의 감독이 올  시즌을 이만기 vs 강호동으로 정의할 만큼 씨름판에서 강호동을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시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 3월 성남에서 열린 18회 천하장사대회에서 씨름판의 스타이자 대선배인 이만기와 처음으로 천하장사 대회에서 맞붙었고 그 전날 백두장사 결승에서 승리하고 준결승에서 또 다시 승리하면서 대선배 이만기에게 모래를 뿌렸던 전설의 세레모니로 전국 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90년 씨름판은 3번의 천하장사대회를 싹쓸이하면서 씨름왕자로 등극했다.

 1991년에는 황대웅 장사와 김칠규 장사와 함께 민속 씨름을 3분했었고 천하장사는 황대웅이 많이 차지했지만, 강호동은 23회 천하장사에 등극했고, 백두장사는 4연패를 달성했다. 그래서 91년 종학 승률에서도 강호동이 당당히 1위를 할 수가 있었다.

 1992년 3월 박광덕과 결승에서 만나서 3:2로 이기면서 천하장사 타이틀을 5회 획득하였고 천하장사에 등극하여 역대 2위인 5차례 천하장사등극의 기록을 달성하지만 이 다음 대회인 63회 체급별장사씨름이 끝난 뒤 소속팀 일양약품을 무단 이탈하여 잠적해버려서 큰 논란이  되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발표를 한 후 그는 씨름계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그렇게 통산우승 12회, 천하장사 5회, 백두장사 7회 우승, 준우승 5회 우승 이라는 결과를 얻게 되고 씨름선수를 그만 둔 후에는 이경규의 추천으로 1993년 MBC 특채 코미디언으로 뽑히게 되어 1박2일 시즌1 메인MC에 출연하며 2008년, 2009년 연속으로 대상을 받게 된다. 현재는 JTBC <아는형님>의 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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